2025년 11월, 전 세계의 시선이 천년의 고도(古都) 경주로 향했습니다. 반도체와 AI, 글로벌 경제 위기를 논하는 최첨단 회의가 서울의 마천루도, 부산의 해안가도 아닌 낡은 기와지붕 아래에서 열린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역설입니다. 하지만 브랜딩의 관점에서 APEC 2025 경주의 이 역설은 치밀하게 계산된 승부수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번 정상회의를 단순한 국가 행사가 아닌, ‘시간’이라는 대체 불가능한 자산을 활용해 브랜드의 격을 증명한 고도의 커뮤니케이션 전략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공간이 곧 메시지다, APEC 2025 경주의 비주얼 전략
브랜딩에서 가장 강력한 차별화는 경쟁자가 모방할 수 없는 자산을 꺼내 보일 때 완성됩니다. 통상적인 국제회의는 거대한 컨벤션 센터라는 ‘박스’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라스베이거스나 두바이, 싱가포르 어디에서 행사를 열든, 회의장 내부의 풍경은 대동소이합니다. 흰색 벽, 빔프로젝터, 그리고 정형화된 테이블은 효율적일지는 몰라도 기억에 남는 시각적 정의(Core Visibility)를 제공하지는 못합니다.
APEC 2025 경주는 이 전형성을 파괴하는 전략을 택했습니다. 인위적인 랜드마크를 새로 짓는 대신, 도시 전체가 품고 있는 1,500년의 맥락을 무대 위로 올린 것입니다. 첨성대의 유려한 곡선과 월정교의 화려한 야경, 불국사 석조 구조물이 뿜어내는 아우라는 그 어떤 최첨단 8K 디스플레이보다 압도적인 해상도를 자랑합니다.
글로벌 빅테크 기업의 CEO와 각국 정상들이 한복의 질감을 느끼며 신라의 고분 능선을 배경으로 미래 기술을 논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 극적인 시각적 대조는 참석자들과 미디어에게 “여기는 다르다”라는 인식을 즉각적으로 심어줍니다. 이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오래된 명제가 APEC 2025 경주를 통해 어떻게 세련된 방식으로 시각화될 수 있는지를 증명하는 사례이며, 동시에 Contexis가 강조하는 ‘보여주는 전략’인 Core Visibility의 정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화백(和白), APEC 2025 경주의 내러티브가 되다
단순히 아름다운 배경을 보여주는 것에 그쳤다면, 이번 행사는 관광 홍보 영상 수준에 머물렀을 것입니다. 하지만 경주는 여기에 역사적 정당성과 내러티브를 입힘으로써 APEC 2025 경주 브랜드 메시지의 밀도를 높였습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신라의 ‘화백‘ 제도를 현대적 외교 프로토콜로 재해석한 대목입니다. 만장일치를 원칙으로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했던 신라의 화백 회의는, 합의와 협력을 중시하는 APEC의 정신과 완벽하게 공명합니다. 주최 측은 자신들을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천 년 전부터 국제적인 교류와 민주적 합의가 이루어졌던 ‘외교의 오리지널리티’를 가진 도시로 포지셔닝했습니다.
이는 과거 실크로드의 종착지로서 서역의 문물을 받아들였던 개방성과 연결되며, “대한민국은 원래부터 세계와 소통하던 나라”라는 메시지를 묵직하게 전달합니다. 2030 부산 엑스포 유치 과정에서 우리가 화려한 K-POP 스타와 영상미에 집중하느라 정작 ‘왜 부산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인문학적 답변을 놓쳤던 점을 상기해 본다면, 이번 APEC 2025 경주는 역사라는 단단한 지반 위에서 브랜드의 당위성을 훌륭하게 설득해 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올드함이 힙함이 되는 순간
마케팅 시장에서 ‘오래된 것’은 종종 ‘도태된 것’으로 취급받습니다. 수많은 기업이 리브랜딩이라는 명목하에 자신들의 로고를 단순화하고 역사를 지우려 애씁니다. 최근 럭셔리 자동차 브랜드 재규어가 특유의 헤리티지를 삭제하고 난해한 현대 미술 같은 리브랜딩을 시도했다가 대중의 거센 반발을 산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반면, APEC 2025 경주의 전략은 정반대입니다. 그들은 오래됨을 숨기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세월의 묵은 때를 ‘깊이’로 치환했습니다. 황리단길에 MZ세대가 열광하는 이유는 그곳이 깨끗하게 정비된 신도시라서가 아닙니다. 낡은 기와와 좁은 골목이 주는 약간의 불편함이 오히려 ‘진짜(Authentic)’라는 감각을 깨우기 때문입니다.
행사 기간 동안 전 세계 미디어를 통해 송출된 경주의 이미지는 이러한 ‘텍스트 힙’과 ‘레트로’ 트렌드의 정점을 보여줍니다. AI 로봇이 서빙하는 미래 기술을 보여주되, 그 배경은 가장 고전적인 한옥으로 설정함으로써 기술은 더 혁신적으로, 전통은 더 힙하게 보이는 상호 보완의 시너지를 낸 것입니다. 이는 낡은 것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관점으로 해석할 때 비로소 트렌드가 된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브랜딩은 발명이 아니라 발견이다
APEC 2025 경주는 우리에게 단 하나의 명확한 인사이트를 남깁니다. 위대한 브랜딩은 없던 것을 만들어내는 발명이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었으나 잊고 있었던 본질을 다시 닦아내는 ‘발견’이라는 사실입니다.
기업이나 개인 브랜드도 마찬가지입니다. 트렌드를 쫓아 겉모습을 바꾸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브랜드가 가진 고유의 역사와 철학을 현대의 언어로 번역해 내는 것은 어렵습니다. APEC 2025 경주는 그 어려운 일을 해냈습니다. 그들은 천 년의 시간을 견딘 돌 하나, 나무 기둥 하나가 그 어떤 화려한 슬로건보다 강력한 설득력을 가진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브랜드는 어떻습니까? 혹시 밖에서 새로운 것을 찾느라, 내 안에 쌓여 있는 보석 같은 유산들을 낡았다는 이유로 방치하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경주가 증명했듯, 오리지널리티는 결코 늙지 않습니다. 다만 재해석되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